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사벨 1세 (문단 편집) === 결혼 ===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된 이사벨에게 유럽의 유력한 여러 국가에서 청혼이 쇄도했다. 그 가운데서 그녀는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와의 결혼을 희망했다. 아라곤은 카스티야의 이웃 나라로, 같은 [[https://en.wikipedia.org/wiki/House_of_Trast%C3%A1mara|트라스타마라 왕조]]의 통치 하에 있었으며 언어와 민족이 비슷했다. 또한 페르난도와는 친척 뻘이기도 했다. 이사벨은 17살의 나이에 두 나라가 합병하면 장차 스페인 반도의 통일, 유럽에서의 정치 무대가 넓어질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복오빠인 엔리케 4세는 그녀를 [[포르투갈]] 왕 [[아폰수 5세]]와 결혼시키려 했다. 이사벨은 결혼을 신청하러 온 포르투갈 왕의 대리인을 쫓아버리고[* 아무리 정략 결혼이라지만, 당시 아폰수 5세는 40세가 넘었기에 이사벨에겐 거의 아버지 뻘이기도 했다.] 아라곤 왕자와의 혼인을 독단으로 결정했다. 격분한 엔리케 4세는 그녀를 궁에 감금했으나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서 이사벨은 부하들을 데리고 탈출, 도망쳤다. 엔리케 왕의 추격을 따돌리며 바야돌리드까지 갔고, 그곳의 귀족에게 보호 받으며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에게 급사를 파견해 나와 결혼을 하러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아본 아라곤 측은 매우 당황했다. 그리고 긴급회의가 열렸다. 자칫 카스티야 왕과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이때 페르난도 왕자는 큰 결심을 하고, 역시 대담하게도 몇 사람의 부하만 데리고 대상인으로 변장해 바야돌리드까지 350km나 되는 거리를 이틀 만에 맹렬히 돌파해서 몰래 이사벨을 만나러 왔다. [[파일:external/www.paradoxplace.com/Catholic-Monarchs-BAR.jpg]] 페르난도 2세-이사벨 1세 부부의 초상화. 당시 초상화들은 이상화된 얼굴을 그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러니까 맨 위의 초상화나 이 부부 초상화나 실제 얼굴과는 차이가 상당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부부가 닮은 이유가 어쩌면 친척이라서 실제로 닮았을 수도 있지만 화가가 자기 주관대로 적절히 [[포토샵]]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1469년 10월 두 사람은 바야돌리드 시에서 엔리케 4세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결혼했다. 너무 서둘렀기 때문에 로마 [[교황]]의 허가를 받을 겨를도 없어서 위기를 맞은 적도 있으나, 다행히도 이들의 결혼을 지지한 톨레도의 대주교가 허가장을 위조해 고비를 넘겼다.[* 두 사람은 부계로 [[6촌]]남매 관계였기 때문에 [[근친혼]]이어서 교황의 허가가 필요했다. 뭐, 나중에는 [[바티칸]]에서 가톨릭 부부왕의 칭호를 주었다.] 이 결혼이 바로 이베리안 웨딩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억지로 모양새를 겨우 취한 혼인이었지만, 이사벨에게 있어 이 때의 일은 인생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5년 뒤에 엔리케 4세가 사망하고,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의 전쟁, 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 공주와의 긴 내전을 연이어 치르면서 모두 승리하고 여왕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한다. 카스티야에서 분쟁이 마무리되었을 무렵 역시 아라곤에서도 페르난도의 아버지인 [[후안 2세]]가 사망해 그녀의 남편인 페르난도 또한 아라곤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때 만약 이사벨이 [[아폰수 5세]]와 결혼해서 아라곤 대신 카스티야-포르투갈이 [[동군연합]]으로 엮였다면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하는 것도 은근히 통용되는 if 떡밥이다.[* 일시적으로나마 [[펠리페 2세]] 시기에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된 적은 있다. [[이베리아 연합]] 항목을 참고 바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